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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현(1933~2020)의 단편소설 ‘분지’는 반공법으로 기소된 첫번째 문학작품으로 꼽힌다. 1965년 정통 문예지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된 이 작품은 발표 당시만 해도 작가 특유의 풍자와 비판 정신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풀어낸 문제작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북한의 선전매체 ‘통일전선’과 ‘조국통일’에 이 작품이 잇따라 전재되면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는 작가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해 모진 심문을 벌였고, 2년 뒤 재판부는 작가에게 징역 6개월에 자격정지 6개월의 선고 디케이디앤아이 유예 판결을 내렸다.
‘분지’가 어떤 작품이기에 반공법 저촉 혐의를 받았을까. ‘분지’는 홍길동의 10대손 홍만수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그의 어머니는 미군에게 강간을 당한 충격으로 세상을 떴고, 미군 상사 스피드와 동거하던 누이동생 분이는 그의 성적 학대에 시달린다. 특히 분이의 국부가 제 아내의 그것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스피드가 분이를 한국장학재단 국가장학금 구타하기까지 한다는 말을 들은 만수는 마침 한국을 방문한 스피드 부인을 향미산으로 유인해 강제로 옷을 벗기고 부인의 국부를 확인하려 하며, 이에 펜타곤이 만수가 있는 향미산을 향해 핵폭탄 발사를 예고하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출판인이자 저술가인 최진섭이 쓴 ‘남정현의 삶과 문학’은 ‘분지’ 필화 사건을 중심에 놓고 남정현의 삶과 문 한국이지론환승론 학 세계를 들여다본 평전 성격의 연구서다. 최진섭 작가는 1999년 ‘분지’를 처음 읽고서 “전율과 전의”를 느낀 나머지 작고한 이기형 시인의 소개로 남정현 작가를 처음 만난 이래 작가와 꾸준히 교분을 이어 오는 한편 2017년에는 남정현의 마지막 소설집인 ‘편지 한 통’을 직접 출간하기도 했다. 900쪽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의 이번 책에서 그는 1959년 건강보험자격득실 등단 무렵까지 남정현의 생애를 간략하게 정리한 데 이어 그의 작품들을 발표 순서대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비평적 평전을 선보였다.



남정현의 삶과 문학 l 최진섭 지음, 도서출판말, 3만5000원


“제가 문학 전 자동대출납입 공자도 아니고 석사 논문도 쓴 적이 없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연구하거나 집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인생에서 밀린 숙제 하나를 마쳤다는 생각은 드네요. 남정현 선생님은 평생 미국과 반공법이라는 화두를 물고 늘어진 작가입니다. 선생님을 인터뷰했을 때, ‘작가란 최일선의 초소에서 민족의 이익을 지키는 초병, 시대의 맨 앞자리에 서서 정신의 영토를 지키는 초병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이 납니다.”
지난 20일 전화로 만난 최진섭 작가는 “남정현 선생은 1960년대에 반공과 친미·친일이라는, 그 누구도 못 건드린 권력의 역린을 건드린 작가였다”며 “요즘 독자들이 선생님의 소설을 다시 읽게 만드는 데에 이 책이 약간의 계기라도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1933년 충남 서산(지금은 당진)에서 태어난 남정현의 연보에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대목들이 있다. 1970년대에 낸 책들에 작가 자신이 직접 작성한 연보에 따르면, 그는 아홉살 때 자칭 신령이라는 노인의 꾐에 빠져 유랑걸식하다가 고아원에 수용되었고, 고아원을 탈출한 뒤 곡마단원이 되어서는 불에 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기(神技)를 몸에 익혀 부활의 명수가 되었으며, 6·25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부활의 신기를 상실한 뒤 그 신기가 그리워 우연히 쓴 단편소설 ‘경고구역’이 문예지에 추천되면서 작가로 등단하게 되었다는 것. 유랑걸식과 고아원 수용, 곡마단 생활 등은 작가의 실제 삶과 무관한 허구적 설정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부활의 신기’라는 능력인데, 소설 ‘분지’의 주인공 홍만수가 펜타곤의 핵 공격을 앞두고도 홍길동의 후손답게 부활을 장담하는 대목이 그와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13년 남정현 소설가(왼쪽)가 ‘남정현의 삶과 문학’의 저자 최진섭 작가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진섭 제공


1958년작인 ‘경고구역’은 ‘분지’와 비슷한 설정을 지닌 작품이다. 주인공인 종수의 여동생 순이가 주한미군 대위 제임스와 교제하다 버림을 받았고 종수가 제임스의 사진을 보며 “언제든 내 기어이 놈을 찾아내어 순이의 청춘을, 아니 이 백의민족의 청춘을 보상받으리라” 다짐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또 “나라의 곳곳을 가로막은 철조망. 그 철조망마다 걸려 있는 무서운 팻말. 경고구역” 같은 구절 역시 분단과 금기의 굴레에 묶인 국토의 현실을 고발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1961년 작가에게 동인문학상 후보작(당선작 없는 가작)을 안긴 중편 ‘너는 뭐냐’는 4·19 혁명을 배경으로 삼았는데, “민중을 압박하고 학대하던 일체의 건물과 일체의 제복들이 민중들의 피를 토하는 함성과 주먹, 방망이에 의해서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순간”이라는 구절에서는 혁명을 목격한 작가의 감격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분단과 독재를 상대로 과감한 필봉을 휘두르며 1960년대 문단을 이끌 유망주로 각광을 받던 남정현은 ‘분지’ 사건으로 당국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다시 글을 쓰면 손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협박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그 결과 4년 정도는 아예 소설을 쓰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었고 그 뒤에는 비판 대상을 미국에서 일본으로 바꾼 ‘허허선생’ 연작에 주력했으나, 1974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다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한달 동안 고문에 시달리면서 심신이 두루 피폐해졌고, 1980년에도 예비 검속으로 구속되는 등 수난이 그치지 않았다. 그 뒤 남정현은 평생을 현기증과 손 떨림 등에 시달리며 글쓰기에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2011년, 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단편 ‘편지 한 통-미 제국주의 전상서’에서 의인화한 국가보안법이 미국을 향해 “당신이야말로 나에게 있어선 그 누가 뭐라든 나의 구세주이시며 동시에 나의 영원한 어버이”라며 살려 달라 애원하는 편지를 쓴다는 설정으로 필생의 주제인 반미주의를 의연히 드러냈다.



남정현 작가가 2013년 모교인 서산 중앙고 교정에 있는 자신의 문학비를 찾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문학비 위쪽에 “민족 자주를 열망한 ‘분지’의 작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남돈희 제공


‘남정현의 삶과 문학’에서 최진섭 작가는 특히 ‘분지’의 여성 혐오를 비판하는 견해를 반박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홍만수가 어머니와 여동생의 원수를 갚는다며 미군 상사 부인을 ‘겁탈’한다는 설정은 그동안 적잖은 비판을 받아 왔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자신의 박사논문 ‘반미문학을 통해 본 식민지 남성성의 형성’에서 “반미문학에 재현된 제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한국 남성의 성폭력 욕망은 저항적 민족주의가 아니다. 한미의 남성 연대이다. ‘분지’에서 주인공의 행위가 그것이다”라고 신랄하게 지적한 것이 대표적이다. ‘분지’에서 홍만수가 스피드 부인의 옷을 벗기고 몸에 올라탔다는 표현은 나오지만 작품 특유의 문체적·형식적 특성 때문에 강간 여부가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데, 생전에 작가 자신은 “작품상엔 절대로 그런 일(=강간)이 없”다고 해명한 바 있다. 최 작가 자신은 ‘분지’에 대한 여성 혐오 주장과 관련해 “엄혹한 군사 파시즘 시대에 풍자와 그로테스크 기법으로 미국과 국가보안법에 맞서 몸부림치듯 글을 써 온 남정현 선생의 본뜻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남정현의 삶과 문학’의 지은이 최진섭 작가가 경기도 마석의 남정현 묘를 찾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묘지의 비석에도 문학비와 마찬가지로 “민족 자주를 열망한 ‘분지’의 작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최진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