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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운동 도중 젊은이 한명이 다가오더니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려서 모욕하는 제스처를 하더군요.”
지난 11일 일본 도쿄 니시오기쿠보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재일동포 3세 김정칙(70)씨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규슈에서 태어난 김씨는 도쿄에서 50여년을 살다가 2년 전 국적을 일본으로 바꿨다.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이전까지 투표권조차 한국토지주택공사www.lh.or.kr모집공고 없었던 그는 이듬해 태어나 처음 ‘투표권’을 행사했고, 올해는 “차별 없는 일본 사회를 만들겠다”는 구호로 지난달 도쿄도의원 선거에 스기나미구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그가 건넨 선거 홍보물에는 “처음 투표소에 간 게 69살 때로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면서 기뻤다”며 “(도의원에 당선되면) 차별과 격차가 없이 자기답게 살 수 있는 도쿄를 만들고 싶다”는 출사표 국민은행 카드사 가 적혔다.
하지만 그는 선거 유세 과정에 ‘혐한’ 공격과 잇달아 마주해야 했다. 지하철역 앞에서 거리 유세 도중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시비를 걸듯 “조센징 아니냐”는 말을 던지고 지나갔다. 며칠 뒤 선거사무소를 들여다보던 한 남성은 선거용 전단지를 내밀자 “자이니치(재일)!”라고 소리치고 달아났다. 김씨는 일부 차별주의자가 소셜 명지대 기숙사 미디어(SNS)에 되레 “김정칙은 일본인을 차별하는 인종주의자”라고 쓴 글도 여러 차례 발견했다. 앞서 출마 예정자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한 경쟁 후보가 김씨를 겨냥해 “매국노라고 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일본에 있지 마라’는 근거 없는 비방을 받았다”며 답답해했다.
일용근로자식대그가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당한 차별은 처음이 아니다. 올해 3월 그는 자신을 겨냥해 “자이니치 김군을 체포하자”, “한국인은 멍청하다”는 등 온라인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올린 고교 동창생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에서 승소했다. 그는 “일본 경제가 30년간 정체된 상황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자, 일본인들이 새로운 세계와 경쟁하거나 어울려 사는 대신 비소구 단절을 택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헤이트(혐오)가 확산하는 것 같다”며 “그 결과로 정치에서도 ‘일본인 퍼스트’ 같은 우익 성향 구호가 유권자들에게 먹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일본 도쿄 니시오기쿠보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재일동포 3세 김정칙(70)씨가 ‘차별 없는 사회’를 구호로 도쿄도의회 선거에 출마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일본에선 지난 20년 넘게 ‘한류’ 흐름이 이어지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과 거리가 한결 가까워졌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해 10월 조사한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에 대해 친밀하게 느낀다는 응답이 56.3%에 이른다.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답은 43.0%였다. 10년 전 조사에서 ‘친밀하게 느낀다’ 31.5%,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가 66.4%였던 것과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한국인 차별’이란 그늘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다. 2010년대 중반 한-일 갈등이 확산하면서 정치권까지 보수 표심을 노리고 노골적으로 ‘혐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 흔했다. 최근에도 정치권이 앞장서 이런 분위기를 악용하는 일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실제 지난 20일 열린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일본인 퍼스트’ 구호를 앞세워 돌풍을 일으킨 신생 소수 참정당의 가미야 소헤이 대표는 당을 비판하는 세력을 두고 “바보, 멍청이 , ‘촌’”이라고 발언했다. ‘촌’은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극우 세력들이 인터넷 등에서 한국인을 비하할 때 쓰는 용어다.
아울러 과거에는 주로 정치·역사적 맥락에서 차별이 있었다면, 최근에는 문화·사회·경제 분야에서 ‘한류’로 상징되는 한국 국력 향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혐한’이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해 일본 연말 최대 음악제 ‘엔에이치케이(NHK) 홍백가합전’에 트와이스, 르세라핌 등 케이팝 그룹이 여럿 포함되자 소셜미디어에 “홍백가합전에 케이팝을 출연시키지 말라”는 주장과 함께 ‘혐한 홍백’이 인기 검색어로 떠오른 게 대표적이다. 한 일본 누리꾼은 엑스(X·옛 트위터)에 “케이팝 때문에 일본인 아티스트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라며 “(공영방송인 엔에이치케이) 출연료는 일본인이 낸 수신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뜸해졌지만 혐한이 출판 등 비즈니스의 한 장르로 교묘하게 발전해 일본 사회에 파고든 사례도 있다. 몇년 전만 해도 일본의 크고 작은 출판사들이 한국과 한국인을 비난하는 책이나 잡지를 내어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잇따랐다. ‘한국이라는 병’, ‘문재인이라는 재액(災厄)’, ‘대혐한시대’ 같은 제목을 단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 건너온 일부 한국인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일본 내 혐한 현상을 부추기는 사례들도 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ㄱ인플루언서 등의 유튜브를 보면, “이재명(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이 그렇게 열심히 했던 모든 반일 운동은 북한 김정은의 명령이었다”는 엉터리 발언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영상에는 일본 우익들이 호응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혐한’이라는 단어는 1992년 마이니치신문이 한국인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부정적 태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기사에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책 ‘혐한의 계보’(노윤선 지음)는 이런 양상을 한국 거부(거한)→불쌍한 한국(애한)→한국 조롱(치한)의 흐름으로 이어진다고 풀이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 경제 불황 속에 성장한 젊은 세대들이 불만을 드러낼 곳을 찾다가 한국인을 혐오하는 방식의 이른바 ‘불안형 민족주의’를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아베 신조 1차 정부가 2006년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육기본법을 개정하면서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2012년 말 다시 집권한 아베 정부가 주도한 역사 수정주의가 일본 사회에 확산하며 이런 흐름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물론 다수 일본인은 ‘혐한’을 포함한 헤이트(혐오)에 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2022년 8월 일본 법무성이 한 헤이트스피치 관련 여론조사를 보면, ‘불쾌하며 용서해선 안 되는 행위’라는 응답(복수 응답 가능)이 53.6%에 이른다. ‘일본에 대한 인상을 나쁘게 하는 행위’라는 응답도 44%에 이르렀다. 하지만 열에 하나 꼴로 ‘표현의 자유 범위에 있다’(9.8%)거나 ‘헤이트스피치를 당하는 쪽이 문제’(9.1%)라는 응답이 여전히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혐한 시위가 극성을 부리던 2016년 5월 ‘헤이트스피치 대책법’(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위한 대응 추진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당시 공안당국이 “혐오 시위를 엄단하겠다”는 방침을 공개하고, 법원이 일부 혐한 시위를 불허하는 등 반짝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시와 도쿄도, 가나가와현 등이 ‘헤이트스피치’ 억제를 위한 조례를 시행했다. 하지만 처벌 규정이 없거나 있어도 규정이 모호하다는 한계 등으로 ‘혐한’을 막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일본 내 차별·혐오 문제 전문가인 프리랜서 언론인 야스다 고이치는 한겨레에 “일본에서 혐한 등 외국인 차별은 뿌리 깊은 식민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인데 헤이트가 결국 일본 사람들과 사회를 망가뜨린다는 인식이 부족하다”며 “지난 20일 끝난 참의원 선거에서 보듯 일본에선 외국인을 차별하고 공격해 정치적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벌칙 조항이 포함된 법률이나 지자체 조례 등으로 이를 차단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일을 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