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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몰랐을 때는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사용했던 용어가, 속사정을 알고 나니 섬뜩한 생각이 들어 사용이 꺼려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때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만 35년에 걸친 한국사의 시기를 우리는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예전 어르신들은 ‘왜정(倭政) 때’라고 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에는 ‘일제시대(日帝時代)’ 또는 ‘일제 침략기(日帝侵略期)’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일제 통치기(日帝統治期)’ ‘일제 식민지 시 바로연결 기(日帝植民地時期)’라는 용어도 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식 용어로 자리잡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입니다.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했던 시기’라는 뜻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표제어를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 『역 단수취급 사』 1910년에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가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45년 광복되기까지 35년간의 시대.
뜻과 풀이 자체로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언젠가부터 이상한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거 북한 용어래!”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알고보니 학교 교육에선 7차 교육과정 중 2 쉽고빠른대출 002년 나온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이 표현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 교과서 중 금성출판사 교과서가 과거 좌편향 교과서 논란을 빚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이 시기를 ‘일제 강점기’라 통칭했고, 이 집필기준에 따른 2000검정 ‘한국사’ 교과서 6종 전체가 ‘일제 강점기’라는 용어를 사용 외환선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용어가 북한의 한국 근현대사 인식을 대변해 주는 북한의 조어(造語)라는 사실이다.”(정경희 ‘한국사 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2015, p.52)
북한의 공식 역사서나 다름없는, 대부분이 김일성의 행적(이라고 주장하는 내용 드림큐 수이 )으로 가득 찬 책이 있습니다. 예전에 주사파 선후배들이 숨겨 놓고 금과옥조처럼 한장 한장 조심스레 들춰가며 보던 굵직한 책, ‘조선통사(하)’입니다.



1980년대 국내 출간됐던 '조선통사(하)'.


이 책에서 규정한 1910~1945년에 해당하는 시기의 명칭이 바로 ‘일제 강점기’입니다. 대표적인 사용을 보면 117쪽에선 한 항목의 제목이 ‘일제의 조선강점’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일제 강점기’와 짝을 이루는 시기의 명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945년 이후 지금까지 남한에 해당하는 시기, 바로 ‘미제 강점기(美帝强占期)’입니다. 북한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시기를 ‘일제 강점기’, 그 이후를 ‘미제 강점기’라 부릅니다. ‘미제 강점’이란 ‘미국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남한) 강제 점령’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마자 38도선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남한이 미국에 의해 점령 당한 ‘미제 강점기’가 시작됐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북한의 역사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조선통사(하)’ 464쪽은 이렇게 서술합니다.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인하여 전후에도 우리나라는 통일되지 못하고 국토와 민족은 양분되여 있었고 남반부는 더욱더 미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갔다.”
1949년에 이미 미군이 철수했는데 자기들이 전쟁을 일으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이 다시 진주하게 된 것은 왜 과감히 생략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경희 교수의 책은 이런 개념이라고 도표를 그렸습니다.



실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라 하겠습니다.
이걸 알고부터는 도저히 그 용어를 기사에 그대로 쓸 수 없어 여러 차례 교열 부서에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신문사의 교열 부서는 엄격한 원칙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이미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어휘를, 더구나 그 자체로 글자 해석상 아무 문제 없는 용어를, 북한의 표현과 같다고 해서 쓰지 않을 수는 없지 않느냐, 남북한이 서로 표현이 같은 용어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는 입장이었습니다. 역시 합리적인 이유를 갖춘 입장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일제 강점기’라는 용어를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일제시대’나 ‘일제 침략기’로 쓴다면 교료된 기사에선 ‘일제강점기’로 고쳐져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었죠. 왜냐하면 표준국어대사전에선 ‘일제시대’를 친절하게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日帝時代) 『역사』 ‘일제 강점기’의 전 용어.
이를 어떡하나. 그래서 그 뒤부턴 약간의 변칙적인 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해당하는 용어를 써야 될 문장이 나오면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10~30년대’ ‘1940년대 초’나 ‘20세기 전반’ ‘한국사의 식민지 시기’ ‘국권을 상실했던 시기’ 등으로 표현을 살짝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가끔씩 ‘내가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가’란 현타가 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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